ソウル市長、韓国初のセクハラ裁判で勝訴した弁護士だった(ニュースde韓国語#119)

行方不明になってから死亡した状態で発見された朴元淳ソウル市長は、3回も連続してソウル市長に当選した与党の大統領選候補の一人だ。
실종됐다가 숨진 채로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은 3차례나 연달아 서울시장에 당선된 여권의 대선 주자 중 한 명이다.
朴市長は1975年にソウル大学法学部に入学したが、維新体制反対デモと故キム・サンジン烈士の追悼式に参加したという理由で投獄され、1年もたたずに除籍された。檀国大学史学科を卒業した後、英国のロンドン政治経済大学で国際法を学んだ朴市長は韓国に戻り、司法試験を準備した。結局、1980年に第22回司法試験に合格した後、大邱地方検察庁の検事に任用されたが、死刑執行場面を参観できないという理由で6カ月後に辞表を出す。

박 시장은 19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유신체제 반대 시위와 고(故)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제적을 당했다.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국제법을 수학한 박 시장은 한국에 돌아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결국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사형 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만에 사표를 낸다.

その後、かなりの期間、人権弁護士として1980年の権仁淑性拷問事件や米国文化院事件、韓国民衆社事件、マル誌報道指針事件など、社会的に敏感な事件を主に担当してきた。故人が弁護した韓国初のセクハラ関連訴訟であるソウル大学ウ助教セクハラ事件は、身体接触や性的な冗談に対する損害賠償を認めた初の確定判決で、職場内のセクハラに対する視線を変えた象徴的な裁判だった。

이후로는 상당기간 인권 변호사로서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고인이 변호한 한국 최초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은 신체접촉이나 성적인 농담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한 첫 확정 판결로,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시선을 바꾼 상징적 재판이었다.

朴市長は1995年から韓国の代表的な市民団体「参与連帯」の事務局長として活躍した。2000年の第16代国会議員選挙を控え、不正腐敗の疑いで政治家を落選させようという運動を展開し、86人の対象者をリストとして発表して、総選挙を控えた政界を揺さぶったりもした。

박 시장은 1995년부터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으로 활약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부정부패 혐의로 얼룩진 정치인들을 낙선시키자는 운동을 전개했고 대상자 86명을 명단으로 발표, 총선을 앞둔 정치권을 뒤흔들기도 했다.

2011年、呉世勲前ソウル市長の辞任で空席になったソウル市の司令塔になった。その後、市民運動家出身のソウル市長として、授業料5割下げ、無償給食、非正規職の正規職化、青年手当、都市再生、社会的経済企業協同組合、原発一基削減、労働理事制度、土建から福祉パラダイムへの転換などの社会政策を断行した。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 사령탑으로 올라섰다. 이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으로서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청년수당, 도시재생, 사회적경제기업 협동조합, 원전하나줄이기, 노동이사제, 토건에서 복지 패러다임으로 전환 등 사회정책을 단행했다.

原文:

ちょっと解説

김상진

1975年4月11日、朴正熙大統領(当時)の維新体制と緊急措置に抗議して、拘束された学生の釈放を求める学内集会の最中に割腹自殺したソウル大学農学部生。民主化を求める声が高まる契機となり、一切の憲法論議を禁じる緊急措置9号や、のちの明洞聖堂の民主救国宣言につながっていきました。

권인숙 성고문 사건

1986年6月5日、富川警察署で、警察官が取り調べの過程で女性学生運動家を性的暴行した事件。刑事告訴に対し、検察が「性的暴行の事実なし」と発表して隠蔽し、逆に運動家に実刑判決が下ったものの、民主化後の1989年に再審の対象となり、警察官は懲役5年の有罪判決が下りました。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ソウル大学化学科で1年契約の助教だった女性が、教授から身体接触や性的言動を受け続け、助教がこれを拒否したために再契約を拒まれたとして、1993年に担当教授とソウル大学総長、韓国政府を相手取って5000万ウォンの損害賠償を求めた民事訴訟。1999年に最高裁で、担当教授に500万ウォンの賠償を命じる判決が確定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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